지상의 모든 것이 영월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오만이 아니라 현실이 그랬다. 사랑해주는 양친, 비단길을 건너 들어온 화려한 옷, 혼자서는 결코 다 먹을 수 없는 진수성찬, 수많은 여흥거리와 형제같은 친구, 아름다운 황궁.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풍경 안에서 영월은 자라났고, 어떤 파문도 변화도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조정은 피비린 곳이었지만 어차피 그의 세상은 조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소. 한결같이 영화로웠던 세계가 한차례 흔들렸다. 가히 격변이라 해도 옳았다. 그는 경이였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란 것을 열일곱 영월은 직감했다. 넘치도록 많은 것이 주어져 한 번도 열망이란 것을 느껴본 적 없는 영월에게 그는 불씨였다. 설소를 볼 때, 설소와 이야기할 때, 설소와 눈을 마주할 때 심장은 빠르게 때론 느리게 타들어갔고, 불씨가 번져가고 커져가는 것은 때때로 아픔을 동반하는 환희로 존재했다. 세상의 모습이 바뀌었다. 설소가 밖을 바라보았던 곳은 가장 훌륭한 안뜰이 되었고, 지나가는 풍경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곳은 설소가 시선을 주자 꽃자리가 되었다. 변화들은 충격적이었으며 찬란했다. 그를 염원했다. 세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줄 알았는데 설소가 없는 공간은 그저 예쁜 것들이 그려진 그림 한 장에 불과했다. 그런 불완전조차 괜찮다고 여기게 만드는 사람이란 얼마나 특별하던지.

영월은 많은 다른 것들이 그랬듯 설소 역시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불완전으로 변모한 세상을 그가 완벽으로 채워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단순하게 당연한 일이니까.



추국이 계속됐다. 금족령이 내려진 영월은 텅 빈 궁에서 멍하게 날짜를 세었다. 하루, 이틀, 나흘, 엿새…. 까맣고 불청결한 어둠 속으로 설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의 찬란, 나의 광휘, 열망, 내 사랑. 영월은 추국이라는 두 글자 안에 담긴 끔찍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황제의 명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본 바 있었으며, 그들이 왜 그렇게 되고 이후로는 어떻게 되는지도 전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과 영월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있을 뿐이었다.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지 않던가. 장벽은 세계를 위한 거름이었다. 그리고 설소가 그들이 되어 끌려갔다. 설소가, 설소가, 설소가.

추국. 고문. 신문. 옥사.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눈가로부터 동통이 느껴졌다. 세상에는 우는 여자와 울지 않는 여자가 있었고 영월은 후자였다. 그는 울어본 적이 손에 꼽았다. 그러나 황망함과 끔찍함, 이 궁까지 닿지 않을 비명, 있을 지 모르는 핏자국, 그리고 감옥에서 풀려나지 않는 설소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목구멍 밑에서부터 거대한 슬픔이 고름이 되어 터져올랐다. 숨이 가빠왔다. 설소가 장벽 너머에 있었다.

모든 것이 꿈 같았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꿈이며 백일몽에 불과하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자신이 그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모황(母皇)이 그를 죽이겠는가? 사랑하는 막내딸의 연인에게 어머니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며, 죄 없음이 명백한 설소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다시 영월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마가 아닌가. 공주의 하나뿐인 연인! 제국의 소태양 아래 무결한 사내! 그러나 시간은 느린 듯 빠른 듯 계속해서 흘러가기만 했고, 영월은 여전히 궁 안에서 혼자였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옥에 갇힌 설소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했다. 그를 고발한 이환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며, 제국의 황제는 자신의 장모님인데 어찌 사위가 역모와 관계가 있겠냐고, 말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텐데 침묵만을 고집한다 했다. 영월은 이유를 가늠해 보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무엇에 의심을 가져야 하는지 몰랐다. 아흔아홉 번을 되짚어봐도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느리게 영월은 깨달아갔다. 설소가 추국에도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모황와 영월의 사람이며 그들에게 역심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정하고 올곧은 설소는 그녀를 한 번도 거절한 적 없었다. 아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월에게 땅 위의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황제가 옥보다도 아끼는 존재에게. 

이것은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였다.

같은 것을 바라고 있으리란 것은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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